영화 〈가능한 사랑〉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딸이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간다고 해서 뭘 보냐고 했더니 이걸 본다고 했다. 딸 혼자 청불 영화를 보게 하기보다는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부랴부랴 예매를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내용이 무겁거나 등장인물들이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타인의 너무 사적인 삶을 엿보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했고, 그 느낌이 영화 내내 일관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란 본래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예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허락한다. 서사와 연출, 때로는 유머와 상징을 통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거리에서 오는 편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날것의 현실, 부부 사이의 균열, 숨겨둔 욕망, 수치심, 그리고 상처처럼 타인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될 영역을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는, 아니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타인의 사적인 삶을 훔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극장에 앉아 있었고, 영화는 계속해서 그 삶을 훔쳐보게 했다. 보고 싶지 않은데 볼 수밖에 없는 불편하고 이상한 감정 속에서 영화를 견뎠다. 중간에 극장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것은 영화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의 삶을 여기까지 들여다보아도 되는가 하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딸만 옆에 없었다면….
그 불편함 위에 또 하나의 감정이 겹쳤다. 설경구가 연기한 인물을 바라보며 느낀 불안이었다. 그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드러낼지, 언제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허용된 경계를 넘어설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화를 품고 있었고 상처받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내면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 그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밖으로 튀어나올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계속 기다리며 영화를 보는 일이 괴로웠다. 공포영화처럼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날 것 같은 불안과는 달랐다. 한 사람이 언제 타인의 경계를 침범할지 모른다는, 현실적인 종류의 불안이었다. 비록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면 전도연이 연기한 인물은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이 없는 듯하면서도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있고, 체념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사람에게 친절한 듯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어적이다. 모순적인 사람인데, 그 모순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그런 여인은 일상에서 자주 본다. 삶에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 사람, 상처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면서도 사람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 사람. 그녀의 행동에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 저러지?’라는 생각보다 ‘저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배우를 보고 있다는 느낌보다 실제로 그런 사람이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조여정이 연기한 인물에게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연민을 느꼈다. 그녀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려 하지만 매우 이기적이기도 하다. 자신도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은 나름의 이유와 진심을 가지고 있으니 결국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점이 오히려 불쌍했다. 동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진정성이 그 행동을 어느 정도 정당화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 ‘나는 진심이었다’와 ‘그러므로 나는 이해받아야 한다’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보지 못하는, 어쩌면 나를 닮은 사람이다.
그녀는 단순한 위선자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깊이 믿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고, 자신에게도 이유가 있으며, 자신도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타인의 이해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해받는 것과 정당화되는 것은 다르다. 그 차이를 끝까지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동시에 현실적이었다.
조인성이 연기한 인물은 조금 달랐다. 그는 부유하고, 성공해 왔고, 앞으로도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아갈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오히려 결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 호기심이 악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다른 삶을 이해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타인의 결핍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이미 그의 안정된 삶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결핍은 그에게 자신의 현실이라기보다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대상에 가까웠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안정된 세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생존과 존엄의 문제인 것이 그에게는 흥미나 잠깐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될 수 있다. 바로 그 차이가 묘한 거리감을 만들었다. 결핍 속에 있는 사람과 결핍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사이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비대칭이 있다. 계층, 혹은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없는 세계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결핍이 삶을 무너뜨리는 사람과, 삶이 너무 안정되어 있어서 다른 종류의 결핍을 느끼는 사람. 결핍이 결핍된 사람이랄까.
이렇게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이해되고, 불안하고, 불쌍하고, 남달랐지만, 상당 시간 동안 영화는 현실의 문법 안에 있는 그들을 훔쳐보게 했다. 여전히 불편함과 불안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현실의 문법을 덤덤하게 이어가는 영화를 힘들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따라갔다.
나에게 문제는 마지막 해변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영화가 갑자기 다른 영화가 되어 버린 것처럼 느꼈다. 인물들을 철저히 현실 속에 가둬 둔 감독이 인물들을 버리고 시를 써버렸다. 영화 전체가 구축해 온 현실의 질감과 인물의 행동 논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런 장면이 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전도연이 연기한 인물이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가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유를 비록 잠시라도 누리고 싶었을 수 있다. 나도 그녀가 그러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화가 보여준 그녀, 우리 삶의 옆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녀라면 그런 행동은 혼자 있을 때 했을 것 같다. 타인이 곁에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인물의 성격과 삶의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조인성이 연기한 인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보여준 그라면 놀라고, 당황하고, 어쩌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바라보았을 것 같다. 그런데 그는 역시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육체적 욕망을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갑자기 어떤 상징 속의 인물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순간 영화가 너무 ‘영화적’이 되었다고 느꼈다.
시작부터 그 시간까지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듯 관객인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물들의 치부와 상처와 불안정을 아름답게 정리해 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 참을 수 없는 현실성을 견디며 영화를 따라왔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영화는 갑자기 자유와 욕망, 지배와 깨달음 같은 상징의 언어로 빠져나가 버렸다.
그것이 아쉬움을 넘어 약간의 화를 불러왔다.
현실을 오랫동안 견디게 했다면 마지막까지 현실의 문법을 유지했으면 했다. 인물들을 끝까지 같은 사람으로 남겨두었으면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인물들이 감독이 말하고 싶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처럼 느껴졌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아마도 자유, 욕망, 지배, 깨달음, 현실 인식,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삶 속에서의 작은 가능성 같은 것을 암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장면이 상징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과 그 장면이 인물의 행동으로서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을 때 처음부터 계속되어 온 감정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타인의 너무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그다음에는 불안했다. 누군가가 언제 경계를 넘어설지 몰라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불만이 남았다.
불편함과 불안 자체는 나쁜 영화 경험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영화는 때때로 관객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감정을 통해 우리가 평소 외면했던 인간의 모습을 보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끝까지 견뎌낸 관객에게는 최소한 하나의 약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자신이 선택한 세계와 인물의 논리를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상당 부분 그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아쉽다.
전도연이 연기한 인물에게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보았고, 조여정에게서는 자기 자신을 믿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안쓰러움을 보았고, 조인성에게서는 결핍을 바라보는 특권적 호기심을 보았다. 설경구에게서는 인간의 내면이 통제되지 않을 때 주변 사람이 느끼는 불안을 경험했다.
그 모든 것을 불편하게, 때로는 괴롭게 따라갔다.
그런데 마지막에 영화가 현실에서 빠져나와 감독이 자신의 시를 써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내게 남은 것은 감동이나 해방감이 아니었다. 불편함과 불안을 견딘 끝에 찾아온 불만이었다.
그 점이 가장 안타깝다.
끝까지 견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따라간 영화였기 때문이다.
거장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거장일 수는 없는 모양이다.
아니, 이렇게 불만을 품고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거장의 힘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