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사신문=김창희 노무사 ]

제22대 국회에서 노동법원 설립 논의가 다시금 진행되고 있다. 사법 절차의 전문성을 높이고 노동 사건을 전담하는 특수법원을 신설하겠다는 취지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진일보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매일같이 임금체불과 부당해고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현장의 절박한 노동자들에게 현재의 노동법원 담론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외형은 그럴싸하지만, 노동자에게 가장 필요한 신속한 구제, 저비용 구조, 실질적 접근성이라는 권리구제의 핵심 알맹이가 통째로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노동법원 모델을 제시하며 기존 노동위원회를 전면 대체하거나 축소하는 방향을 논해왔다. 하지만 사법부 체계로 분쟁 해결의 중심축이 전환되는 순간, 노동 행정이 가졌던 기동성은 상실되고 분쟁 해결은 극도로 느려지며 문턱은 더욱 높아진다. 노동법원은 엄격한 절차법적 원칙과 서면주의, 철저한 증거재판주의가 지배하는 사법부 산하 조직이다. 1심 판결에만 최소 1년 안팎이 소요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당장 다음 달의 방세와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에게 이처럼 지난한 소송을 견디라는 것은 사실상 구제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대리인 선임과 비용의 문턱도 노동자들을 절망케 한다. 노동위원회 단계에서는 노동자가 홀로 서더라도 공익위원과 조사관의 직권조사 및 심문 과정을 통해 사실관계가 보완될 수 있다. 그러나 법원 소송으로 무대가 옮겨지면 철저한 당사자주의로 인해 전문 법률 대리인 없이 거대 기업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미 노동위원회 단계에서 수개월간 호흡을 맞추며 신뢰를 쌓은 공인노무사 대리인을 해촉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변호사를 새로 선임해야 하는 이중의 경제적·시간적 부담은 가혹하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결국 자금력을 가진 자만이 사법적 구제를 독점하는 결과를 낳아 노동분쟁의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심화시킬 뿐이다.
객관적인 수치도 노동위원회의 강력한 존치 필요성을 명백히 뒷받침한다. 중앙노동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전체 노동 분쟁 사건 중 무려 97%에 달하는 압도적인 비율이 법원 소송으로 가지 않고 노동위원회 단계에서 화해, 취하, 판정 수용을 통해 자체 종결된다. 최종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비율은 단 3% 내외에 불과하다. 이는 노동위원회가 이미 신속성과 편의성을 무기로 현장에서 높은 실효성과 수용성을 인정받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이 효율적인 기구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을 사법 소송의 장으로 내모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개악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관점에서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진정한 해법은 오랜 기간 검증된 노동위원회의 신속성과 약자 보호라는 순기능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법원을 고등법원급으로 설치하는 융합형 체계 개편에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노동 분쟁은 지노위→중노위→행정법원→고등법원→대법원으로 이어지는 사실상의 5심제라는 비효율적 구조로 운영되어 과도한 절차 중복을 낳고 있다. 만약 기존 노동위원회의 심판 기능을 유지하면서 특허법원과 마찬가지로 노동법원을 행정법원급이 아닌 고등법원급으로 설치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불필요한 행정소송 단계를 생략하고 지노위→중노위→노동법원→대법원의 4심제로 단축함으로써 신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사법 절차의 전문성까지 보완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이 된다.
이와 동시에 노동위원회의 기능과 조직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대 개편해야 한다. 고용노동청 노동감독관의 손에 묶여 수개월씩 정체되어 있는 임금체불 사건과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 사건의 실질적인 심판 및 조정 기능까지 모두 노동위원회로 일원화해야 한다. 사후적 분쟁 사건이 노동위원회라는 하나의 전문 기관으로 통합되면 사건 조사와 심문, 판정 절차가 일관되게 표준화되어 불필요한 행정력 투입과 시간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아울러 고용노동청은 본연의 임무인 사전예방적 노동감독에만 집중할 수 있어 노동행정의 효율성이 제고된다.
나아가 물리적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고양시나 화성시 등 인구 100만 명 안팎의 거대 기초자치단체에 지방노동위원회를 신설하고 서울지방노동위원회를 4개 이상으로 분할해야 한다. 중앙노동위원회 역시 권역별로 3~5개로 늘려야 한다. 권리구제 기능 확대에 따른 조사관 인력 부족 문제는 실무 경험이 풍부한 공인노무사들을 임기제 공무원 조사관으로 채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등법원급 노동법원 단계에서도 노동자가 원할 경우 기존 공인노무사 대리인에게 제한적 소송대리권을 부여하거나 일본식 보좌인 제도를 도입해 재판에 출석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어야 비용 장벽을 허물 수 있다.
노동법원이라는 틀로 제도의 외형만을 꾸미는 사법 담론은 결코 노동 현장의 절박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알맹이가 빠진 개혁은 결국 사법부의 조직적 덩치를 키우는 수단으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진정으로 노동자를 위하고자 한다면, 기존 노동위원회가 가진 신속·저비용이라는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고등법원급 노동법원을 결합하는 실질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겉만 번지르르한 제도적 환상에 취해 절박한 노동자들을 기약 없는 소송의 늪으로 밀어넣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대리석의 거대한 법원 건물이 아니라 노동자가 일터와 삶 속에서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촘촘하고 따뜻한 권리구제 제도의 실질적 보완이다. /끝/
노무법인 사람 공인노무사 김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