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법인 사람 공인노무사 김창희
우리나라에 퇴직연금 제도가 도입된 지 어느덧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전체 적립금 규모는 500조 원을 돌파하며 외형적으로 비대해졌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성적표는 실망스럽다. 전체 취업자 기준 가입률은 24%에 그쳐 일하는 사람의 3분의 2 이상이 노후 소득보장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고, 최근 5~10년간의 평균 수익률은 2%대 안팎에 머물러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사실상 원금 보전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 지난 한 해 퇴직연금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은 2조원을 넘어섰다. 이러한 시장 실패의 근본 원인은 상품 공급자인 민간 금융회사들이 퇴직연금 시장을 독점하고 주도해 온 ‘계약형 지배구조’에 있다. 금융기관들은 가입자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운용·자산관리 수수료와 상품 판매 보수를 이중으로 수취하는 고비용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이러한 한국의 현실은 2000년대 중반 영국의 연금개혁 및 NEST(국가퇴직연금신탁) 도입 이전 상황과 소름 돋을 정도로 유사하다. 당시 영국 역시 중소기업과 저임금 노동자층에서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발생했고, 민간 금융회사들은 수익성이 낮은 영세 취약계층에 대한 서비스를 소홀히 했으며, 복잡하고 불투명한 수수료 구조로 인해 노동자들은 무관심과 방치 편향에 빠져 있었다. 이에 영국은 2008년 연금법 개정을 통해 모든 사업장에 자동가입제도를 도입하고, 공적 수탁기관인 NEST를 설립하여 민간이 기피하는 저소득·영세기업 노동자를 전원 수용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영국 NEST의 극적인 반전은 공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배구조와 디폴트 중심의 인프라가 결합할 때, 공공의 역할이 시장 실패를 성공적으로 구제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올해 노사정과 전문가들로 구성된 퇴직연금 실무작업반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금융기관 개방형, 연합형, 공공기관 개방형(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이라는 3대 기금형 모델의 설계 틀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기금형 제도가 단순히 외형적 도입에 그치지 않고, 가입률을 90% 수준 이상으로 획기적으로 견인하기 위해서는 현행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의 역할과 기능을 전면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핵심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옵트아웃(Opt-out) 방식을 벤치마킹한 한국형 자동가입제도의 도입이다. 퇴직연금 미도입 사업장의 사업주와 노동자가 별도의 신청을 하지 않더라도 법정 요건을 충족하면 공적 기금형 퇴직연금에 자동으로 우선 가입되도록 디폴트 값을 설정해야 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가입을 유지하되 사후적으로 탈퇴할 권리를 주는 이 메커니즘이야말로 취약계층의 노후 자산을 든든히 지켜줄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이 과정에서 공적연금 자산의 지배구조를 올바르게 확립하는 일은 제도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가 된다. 1층 공적연금인 국민연금기금은 부과방식에 기초한 전 국민 대상의 사회보험으로, 소득 재분배와 세대 간 연대를 중시한다. 반면 2층인 퇴직연금기금은 노동자의 후불임금이자 개별 적립 성격이 강한 사적 자산으로, 수탁자책임(Fiduciary Duty)에 따라 철저히 가입자의 이익과 수익률 극대화를 목표로 움직여야 한다. 지배구조의 정체성이 판이하게 다른 만큼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기금까지 운용한다면 심각한 이익충돌과 내부 비효율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민연금공단을 퇴직연금기금 사업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해야 마땅하다. 대신,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이 일정 규모에 도달하면 퇴직연금공단을 신설하여 국민연금기금과 퇴직연금기금 간의 상호 건전한 성과 경쟁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자산운용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두고 양대 공적 기금이 경쟁한다면 비로소 대한민국은 노후빈곤률을 낮추고 진정한 연금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더불어 노동계층의 뼈아픈 사각지대를 완전히 걷어내기 위한 추가적인 입법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현행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계속근로기간 1년 미만 기간제나 주 15시간 미만의 초단시간 노동자를 제도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여 심각한 이중차별을 초래하고 있다. 1년 미만 단기 계약자라도 근무한 기간에 비례하여 퇴직연금을 축적하도록 가입 제외 규정을 과감히 삭제해야 한다. 또한 긱 경제의 확산으로 급증한 노무제공자들(특수고용직 및 프리랜서 포함) 역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의 의무 적용 대상으로 포괄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의 기여금 납부를 의무화하고 정부의 재정적 매칭 지원 인프라를 연계한다면 일하는 사람 누구나 소외 없이 노후 연금자산의 권리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방대한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한국형 자동가입제를 현장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현장 실무의 최전선에 있는 공인노무사 역할과의 연계가 필수적이다. 중소영세기업들은 인사노무 관리 역량이 부족하여 제도가 바뀌어도 법을 위반하거나 가입을 누락할 위험이 크다. 전국의 수많은 기업들에서 빈틈없이 인사노무 컨설팅을 할 수 있는 노무사들이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과의 긴밀한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노무사들이 사업장의 연간 임금총액을 바탕으로 노동자별 정당한 퇴직연금 납입 기준액을 정확히 산출하고, 이를 실제 납입액과 교차 검증하여 3자(공단, 사업주, 노동자)에게 주기적으로 통지하는 실무 인프라를 주도한다면, 현장의 과소·불완전 적립과 노사 분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노무사의 전문성과 공적 기금의 신뢰성이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기금형 퇴직연금은 마침내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속가능한 삶을 담보하는 든든한 노후 보장 기틀로 자리 잡을 것이다. /끝/
노무법인 사람 공인노무사 김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