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한국의 노동운동은 다시 한 번 방향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상징되는 ‘노동자의 인간선언’ 이후 반세기 동안, 한국의 노동운동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파고 속에서 사회정의의 마지막 보루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저성장·고령화·기술혁신이 중첩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투쟁 중심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시대적 해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노동운동은 협력과 생산성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1. 세계 노동운동의 전환점: ‘투쟁’에서 ‘협력’으로
세계 노동운동의 흐름은 투쟁에서 협력으로의 진화를 분명히 보여준다.
19세기 산업혁명기의 노동조합은 생존을 위한 저항 그 자체였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 독일의 카를 마르크스, 프랑스의 프루동은 자본의 착취에 맞서 노동가치를 주장했고, 계급투쟁은 노동운동의 상징적 언어였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주요 산업국가들은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채택한다.
스웨덴은 1938년 살츠요바덴 협약(Saltsjöbaden Agreement)을 통해 노사정이 임금·고용·복지를 함께 결정하는 제도를 확립했고, 일본은 ‘도요타식 노사협력’을 기반으로 생산성 중심의 산업질서를 만들어냈다.
미국의 사무엘 곰퍼스(AFL)는 “정치보다 생활”을 내세운 실리노선을,
월터 루서(UAW)는 생산성 연동형 임금체계를 도입하며 노동운동의 실용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변화는 노동운동이 투쟁의 도덕성에서 협력의 실용성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즉, “적대적 노사관계”가 아니라 “상생적 노사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선진국의 공통된 역사적 궤적이었다.
2. 한국 노동운동의 특수한 궤적
한국의 노동운동은 근대화의 압축 성장 속에서 형성되었다.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은 억압과 희생의 상징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근로기준법 준수’라는 최소한의 인간적 요구였으나, 그것이 제도적 변화의 불씨가 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창립은 노동운동의 제도적 완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사관계는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의 급증, 구조조정의 상시화, 글로벌 공급망 경쟁 등은 “고용 안정과 경쟁력 강화”라는 이중 과제를 노동운동 앞에 던졌다.
이 시기부터 일부 노조는 생산성 논의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강경한 투쟁 중심의 이미지가 노동운동 전반을 지배했다.
현재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약 14%, OECD 평균(30% 내외)에 한참 못 미친다.
조직 범위 또한 대기업·공공부문 중심에 편중되어 있으며, 청년·여성·플랫폼 노동자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노동운동의 영향력은 사회적으로 강조되지만, 실제 대표성은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한 이미지, 약한 기반’이라는 한국 노동운동의 구조적 역설이다.
3. 협력과 생산성: 노동운동의 새로운 생존 전략
오늘날 노동운동의 가장 현실적인 과제는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다.
이를 위해서는 ‘협력’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라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김금수는 일찍이 “생산성 없는 임금 인상은 오래가지 못하며, 협력 없는 경쟁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그는 한국형 노사관계의 미래를 ‘경쟁적 상생(competitive partnership)’이라 정의했다.
이는 노동운동이 더 이상 임금 인상이나 고용 유지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산현장의 혁신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웨덴의 노동조합은 임금교섭을 산업별 생산성과 연동시키고, 일본은 기업별 노조가 품질혁신(QC) 활동과 경영참여를 병행한다.
이러한 모델은 노조가 ‘비용 요인’이 아니라 ‘혁신 자산’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 길을 선택할 때, 비로소 산업경쟁력과 노동권익이 공존할 수 있다.
4. 전환을 위한 정책과 실천 과제
1) 노사정 대화의 제도화와 상시화
2) 생산성 기반 임금체계로의 전환
3) 청년·비정규직 포괄형 노동운동으로 확장
4) ESG 시대의 노동 역할 재정립
5. 결론: ‘투쟁의 힘’에서 ‘협력의 지혜’로
21세기의 노동운동은 더 이상 “누구와 싸울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성장할 것인가”의 문제로 진화해야 한다.
노동운동이 협력의 길을 걷는다고 해서 그 정신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협력은 투쟁의 다음 단계이며, 상생은 저항의 완성이다.
전태일이 외쳤던 “사람답게 일하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 외침은 “사람답게 함께 일하는 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품격 있는 노동, 그리고 상생의 경제를 향한 길—
그 길의 출발점은 바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철학, ‘협력의 이념’이다.
결어
“투쟁으로 권리를 세웠다면, 이제 협력으로 미래를 세워야 한다.
한국 노동운동의 다음 100년은 ‘강한 단결’이 아니라 ‘지혜로운 연대’ 위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전태일과 김금수를 기다리면서,,,
[노무사신문=박원용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