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왕릉답사에 나서며 (답사일 : 2026. 6. 20)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릉 작은 걸음 큰 울림, 왕릉답사, 오늘은 조선 10대 왕, 연산군, 황제를 흉내낸 연산군묘 입니다. 때 이른 무더위와 가뭄 속에 여름 단비가 내려 물 한모금 머금은 나뭇잎 사이로 왕릉 보호수 500년 넘은 은행나무가 나그네를 반갑게 포용합니다.
2. 연산군 이융은 누구인가?
연산군(1476년 ~1506년)은 성종과 윤기무의 딸인 함안윤씨 사이에 태어나 예종 이황과 같이 19세에 조선 10대 왕이 된다. 처음엔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초기 만연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해 금제절목을 만들고. 암행어사 파견, 변방지역의 여진족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족을 회유하여 변방지역의 안정을 유지하였다.
또한 문신의 사가독서제를 실시 하고 세조 이래 <국조보감>을 편찬하여 후대왕들의 제왕수업에 귀감이 되게 하였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종묘제도 정비, 상평창을 설치하여 물가안정, 비융사를 설치하여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고 국방에 전심전력,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없애는 업적이 상당하다.
그러나 어머니 폐비윤씨의 폐비 경위를 알게 되면서 정신이 돌아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선비를 죽이고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탕진하였다. 참고로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고, 갑자사화는 생모 폐비윤씨의 금삼의 피가 단초가 되었다.
한편 1506년 박원종, 신윤무, 유순정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위리안치 중 병사하였고,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서 우이동 넘어가는 길 왼쪽에 묘가 위치하고 있다.
3. 연산군묘 안내표지판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이 어려워지자, 반정으로 폐위되어 이복동생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연산군은 강등,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1512년(중종7년) 부인 신씨가 묘를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중종은 1513년 왕자의 예에 따라 묘를 옮기고 양주군의 관원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석인, 재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묘역에 있는 석물들은 조선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을 볼 수 있다. 연산군묘 아래쪽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사위 구문경의 묘가 있다.
* 사화 :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 이라는 뜻으로 연산군 재위기간 중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음.
4. 연산군(燕山君)의 치세
조선의 정치이념인 성리학은 인간을 지배층인 사대부와 피지배층인 백성으로 나누는데, 사대부의 입장에서 세상을 해석한 것이 바로 성리학이다. 결국 성리학은 양반들이 일반 백성들을 합법적으로 운용, 먹고 살 수 있도록 법적, 학문적인 뒷받침을 해주었던 것이었다 . 그래서 양반들은 조, 용, 조에 해당하는 병역과 세금을 면제 받고 노비를 거느리며 마음대로 이리 오너라! 큰소리 치며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성리학을 부정하고,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을 자신의 환락의 장소로 디자인해 버렸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대학로가 젊음의 거리가 되었다. 한편, 1494년 성종이 죽자 세자 이융은 19세 나이에 즉위하여 1506년 중종반정으로 혈기 왕성한 30세에 폐위되었다.
그럼 즉위 초기에 잘 나가던 연산군이 왜 폭군이란 소리를 듣게 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연산군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폐비 윤씨사건)를 거치면서 생모 폐비윤씨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원망, 할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한 후궁들의 모함과 탐욕, 그리고 고위관리들의 야합을 목격하고 정신이 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연산군이 술과 여자, 사냥을 좋아 한 것은 부왕 성종을 빼닮았으나 성종은 그 일로 별로 욕을 안 먹고, 왜 어째서 연산군은 폭군이란 오명을 썼을까요? 굳이 말하자면 성종은 시와 때를 가릴 줄 알았고, 연산군은 시와 때를 몰랐던 그 차이였다. 조선 왕중 연산군은 시를 엄청 좋아해 실록에 남아 있는 그의 시가 자그마치 130편에 달한다.
5. 흥청망청과 장녹수
<연산군 일기>에는 연산군이 호색하고 황음무도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산군의 여성 편력에 등장하는 흥청(興淸)은 기생집단이 아니라 당시의 태평성대를 기리기 위한 여성가무 악대였다. 당시 간신 임사홍, 임숭재 부자는 채흥사가 되어 연산군이 원하는 거문고를 잘 타고 얼굴이 예쁜 운평들을 전국 각지에서 모집하여 상납했다.
사실, 흥청이란 고려 때부터 궁중 음악을 연주하는 관기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여악이 되려면 '장악원'에 들어가 가무와 예절을 익히고 글을 배워야 했고, 이들은 팔관회 등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들의 역할은 조선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가 대한제국 멸망 1년전 1909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이렇게 흥청이란 여인 가무악대 였지, 연산군이 음락을 즐기기 위해 만든 기구가 아니였다. 그리고 흥청에 선발된 여인들은 창기나 자색이 있고 음률을 아는 여인들 이었다. 이들 중 연산군과 정신적, 육체적으로 교감을 나누었던 여인은 월하매와 광한선 그리고 장녹수 정도였다. 특별히 수 많은 흥청중 제일은 장녹수다.
7. 연산묘 답사를 마치며
6월의 마지막 주말입니다. 한 여름날의 단비 한 모금, 폭염을 막아주고 열기를 식혀준다.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손님 연산, 역사적 대우는 그저 그렇고 패륜으로 각인된 연산군.
연, 연산은 성종대왕과
폐비윤씨의 첫째 아들로
인수대비의 손자
산, 산해진미와 흥청망청
요녀 장녹수 탓으로
분탕질해 반정명분
중종반정 강화유배
군, 군으로 격하시켜
왕의 시호가 없고
미친놈으로 희극화
해도 해도 너무하네
좋든 싫든 군왕인데
진성군의 중종반정
연산군을 폭군으로
각인시켜 역사기술
묘소 앞 수령 500년 고목의
은행나무 만이 연산묘를
수호하고 능역안 꼬여진
소나무는 연산의 꼬인
역사를 웅비한다.
어쨌든 연산을 조선의 왕
으로 인정안 할 이유가 없다.
연산을 왕으로 인정하여
종묘에 배향해야 합니다.
오늘날 서울 도봉구 방학동 학마을 옆에 초라하게 잠들어 가끔 영화감독들이 영화 찍는다고 왔다갔다 하며 당시의 시대상을 상상할 뿐이다. 어쨌든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니 말하지 않는 것들과의 대화에 나설 뿐이다.
2026. 6. 20.
강경만/ (한솔노무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