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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는 어디까지 운명을 함께해야 하는가
  • 이동신 노무사
  • 등록 2026-08-26 17: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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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사는 운명공동체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위험을 함께 부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

[노무사신문=이동신 노무사 ]



SK하이닉스의 ‘임금 3% 이연’이 던지는 질문


SK하이닉스 노사가 지난 8월 20일 2026년 임금·단체협약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임금을 6.3% 인상하고 성과급의 60%를 자사주로 지급하는 내용이 핵심이지만, 눈에 띄는 대목은 따로 있다. 향후 회사가 적자에 빠질 경우 고용안정 대책을 먼저 협의한 뒤 임금의 최대 3%를 이연 지급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경영이 정상화되면 이연된 금액은 다시 지급된다.


이 합의는 하나의 철학을 담고 있다. 회사가 성장할 때는 성과를 나누고, 어려울 때는 고용안정을 전제로 구성원도 일정한 부담을 함께 진다는 생각이다. 구조조정보다 고용유지를 우선하겠다는 취지도 이해할 만하다. 숙련 인력이 경쟁력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에서는 불황기에 인력을 감축했다가 호황기에 재채용하는 쪽이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노동법의 관점에서는 별도의 질문이 생긴다.


노사가 합의하면 지급해야 할 임금의 일부를 나중에 지급할 수 있는가?


임금은 전액을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다


근로기준법 제43조는 임금을 근로자에게 직접, 통화로, 전액 지급하도록 규정한다. 이른바 ‘임금 전액불 원칙’이다. 임금이 100이라면 사용자는 원칙적으로 100을 지급해야 한다.


만약 회사가 적자를 이유로 97만 지급하고 나머지 3을 훗날로 미룬다면, 그 3이 이미 발생한 임금인 한 근로자의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가 지급을 미루고 있을 뿐이다.


근로기준법은 법령이나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으면 임금 일부의 ‘공제’를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제와 이미 지급해야 할 임금의 일부를 사용자가 보유한 채 미래의 불확정한 시점까지 지급을 미루는 것은 다른 문제다.


따라서 ‘임금 3% 이연’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임금 전액불 원칙, 나아가 정기불 원칙과의 관계에서 법적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핵심은 ‘이연’인가, ‘임금조건 변경’인가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등장한다.


적자기간에도 임금 100이 발생하는데 그중 3의 지급만 미루는 구조인지, 아니면 단체협약에 따라 적자기간의 장래 임금 자체가 97로 변경되고 경영이 정상화되면 추가로 3을 지급할 의무가 발생하도록 설계된 구조인지에 따라 법적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경제적 결과는 비슷해 보여도 법적으로는 상당히 다르다.


전자는 이미 발생한 임금의 지급을 유예하는 것이고, 후자는 장래의 임금조건 자체를 변경하는 것이다. 후자라면 사용자가 97을 지급한 시점에 그때 지급의무가 있는 임금 전액을 지급한 셈이 된다. 이후 흑자전환이나 경영 정상화라는 조건이 충족될 때 추가 보상 3이 새롭게 발생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이 경우 임금 전액불 원칙과의 충돌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언론이 사용한 ‘이연’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그 3%에 대한 법적 권리가 언제 발생하도록 합의되어 있는가이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 2022. 3. 31. 선고 2020다294486 판결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단체협약으로 포기·반납이 가능한 임금·수당의 범위가 다투어진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미 구체적인 지급청구권이 발생한 임금은 근로자의 사적 재산영역에 속하므로, 노동조합이 개별 근로자의 동의나 수권 없이 단체협약만으로 이를 반환·포기하거나 지급을 유예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임금에 관하여 정해진 지급기일이 있는 경우에는 그 지급기일이 도래했는지를 기준으로 구체적인 지급청구권의 발생 여부를 판단한다.


이는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에도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노동조합은 장래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형성·변경할 수 있지만, 이미 개별 근로자에게 구체적으로 귀속된 임금채권까지 자유롭게 처분할 수는 없다.


다만 이 판결을 “지급기일 전에 합의하기만 하면 임금 일부를 얼마든지 이연할 수 있다”는 뜻으로 확대해석해서도 안 된다. 이 판결은 이미 구체적으로 발생한 임금채권을 노동조합이 어디까지 처분할 수 있는지를 다룬 것이지, 근로기준법상 임금지급 원칙에 반하는 모든 형태의 지급유예를 단체협약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어디까지 경영위험을 나눠야 하는가


SK하이닉스 사례가 던지는 더 흥미로운 질문은 법률 문제를 넘어선다.


근로자는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사용자는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을 결정하며 그 결과 발생하는 이익과 손실을 부담한다. 근로자는 어떤 설비에 투자할지, 어느 사업에 진출할지, 얼마를 차입할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경영판단의 결과 발생한 위험 역시 원칙적으로 사용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성과의 공유와 위험의 공유는 반드시 같은 문제는 아니다. 회사가 큰 이익을 냈다고 그 이익이 자동으로 근로자에게 귀속되지 않는 것처럼, 경영 실패의 결과 역시 당연히 근로자가 부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노사는 같은 배를 탈 수 있지만, 그 배의 항로를 정하는 권한까지 동일하게 갖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노사운명공동체’라는 발상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구성원들은 오랜 시간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고 기업의 경쟁력을 만들어간다.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지키기 위한 자발적인 희생 역시 충분히 의미가 있다.


다만 공동체 정신과 법률상 권리·책임의 배분은 구별되어야 한다. 현대 노동법이 임금, 근로시간, 해고 등에 강행적 보호장치를 두는 것도 근로관계에 내재한 경제적 힘의 차이를 고려한 결과이며, 임금 전액불 원칙 역시 그중 하나다.


좋은 의도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법이 설정한 위험배분의 경계를 쉽게 허물 수는 없다.


꼭 임금을 이연해야만 할까


노사의 고통분담은 다른 방식으로도 설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자 시 임금인상을 동결하는 방법이 있다. 이미 약정된 임금은 전액 보장하되 미래의 인상분을 조정하는 것이다. 근로자는 기존 임금을 보호받으면서도 회사의 어려움을 함께 부담할 수 있다.


성과급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기본임금은 근로 제공의 대가로 안정적으로 보장하고, 경영성과와 연동되는 부분은 성과보상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기본임금은 노동의 대가이고, 성과급은 성과의 공유다.


회사에 성과가 있을 때는 그 과실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성과가 없을 때는 가변적인 보상도 줄어드는 방식이라면 경영성과와 보상의 관계도 보다 명확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담의 대칭성이다.


근로자에게 임금인상 포기나 다른 희생을 요구한다면 경영진과 주주 역시 임원 보수, 배당, 자사주 매입 등의 조정을 통해 일정한 부담을 함께 진다는 신호가 필요하다.


인사관리의 관점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근로자가 회사의 어려움을 함께 감당하려면 법률적 합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 내가 이 부담을 져야 하는가?”


이 질문에 조직이 공정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운명공동체’라는 말은 협력의 언어가 아니라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언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좋은 의도일수록 좋은 제도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노사는 상당 부분 운명을 공유한다. 기업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면 고용도 지속될 수 없고, 구성원의 역량과 헌신 없이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도 어렵다.


그러나 노동법은 노사를 모든 위험을 동일하게 부담하는 완전한 운명공동체로 전제하지 않는다.


사용자에게는 경영권이 있는 만큼 경영위험이 있고, 근로자에게는 노동을 제공하는 대신 그 대가인 임금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이 경계를 인정한다고 공동체 정신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자의 권리와 책임을 분명히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양보라야 지속가능한 협력이 될 수 있다.


성과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도 함께 대응하겠다는 SK하이닉스의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다만 그 정신을 구현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반드시 ‘임금의 이연’이어야 하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적자 시 임금인상을 동결하고, 성과가 없으면 성과보상이 줄어들도록 하며, 회사가 다시 성장하면 그 과실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방식도 있다. 그것이 경영위험과 노동의 대가라는 노동법의 기본적인 경계를 지키면서도 노사가 서로의 운명을 외면하지 않는 보다 현실적인 길일 수 있다.


노사는 운명공동체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위험을 함께 부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공정한 경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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